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,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.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정난의 변 (문단 편집) == 개요 == >을축일, 금천문(金川門)에 이르러, 곡왕(谷王) 혜(橞), 이경륭 등이 문을 열고 왕을 받아들이니, 도성이 마침내 함락되었다. 이날, 왕이 여러 장수들을 나누고 명하여 도성 및 황성을 지키도록 하고, 돌아와 용강(龍江)에 주둔하면서, 영을 내면 군민을 안무했다. 크게 수색하여 제태, 황자징, 방효유 등 50여 인을 붙잡고, 그 성명을 방에 걸어 '''간신'''(奸臣)이라 하였다. >---- >《[[명사(역사책)|명사]]》 <성조본기>(成祖本紀) [[1399년]] [[8월 6일]]부터 [[1402년]] [[7월 13일]]에 이르는 약 3년의 기간 동안 당시 신생제국 [[명나라]]을 뒤흔든 거대한 규모의 [[내전]](內戰)이다. 훗날의 성조 [[영락제]](永樂帝)인 연왕(燕王) [[영락제|주체]](朱棣)와 당시 명나라의 제2대 황제였던 혜종 [[건문제]](建文帝) 주윤문이 대결했다. 그리고 결국 최후의 승리자는 [[난징|남경]](南京)을 함락시킨 주체였다. [[명나라]](明)가 개국한 지 30여 년 정도가 흐른 뒤에 벌어진 대규모 내전으로, 동성 제후(諸侯)들의 세력을 약화시키려는 중앙과 이에 반발하는 지방의 대결이라는 점에서 [[전한]](前漢) 시대 초기에 벌어진 [[오초칠국의 난]](吳楚七國-亂)과 많은 유사성을 지니고 있다. 그러나 오초칠국의 난에서 승리자였던 쪽은 당시 중앙의 입장이었던 [[한경제]](漢景帝)였음에 비해, 정난의 변 당시 승리자는 오초칠국의 난 당시 오왕(吳王) [[유비(오왕)|유비]](劉濞) 같은 포지션이었던 연왕 주체였다. 이로 인해 명나라는 황제가 교체되는 초유의 사건에 직면하게 된다. 중국에서는 단순한 제위 다툼을 넘어서 3년간의 내전으로 번졌으므로 '정난의 변'보다는 '''정난지역'''(靖難之役, 정난 전쟁)이라고 부르는 빈도가 더 많으며, 이 표현이 실제 역사에 더 부합하는 표현이다.[* '정난의 변'이라는 명칭이 일본에서 온 것이라는 오해도 있는데, 당장에 [[현무문의 변]], [[정강의 변]]이나 [[토목의 변]] 같은 명칭을 생각해 보면 답이 나온다. 중국에서도 '~의 변'이라는 명칭은 자주 쓰이며, 한국사에도 조선시대의 '작서의 변'이나 '홍수의 변', 그리고 [[제1차 왕자의 난]](무인정사) 경우에도 '무인지변'으로 쓰인 것처럼 정치적인 변고를 일컫는 표현으로 자주 쓰였다.]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-BY-NC-SA 2.0 KR으로 배포하고,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.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.캡챠저장미리보기